평론


2003

박현정의 첫 개인전에 부쳐                                                                                                                                                                                                                                 유 홍 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아주 미술계를 떠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사실상 미술평론가로서의 활동은 중단한 셈이다. 더욱이 현장비평이라 할 개인전의 평을 써본 지는 퍽 오래됐다. 그럼에도 박현정의 개인전 평을 쓰는 것은 10년 전의 약속 때문이다. 박현정은 대학 1학년 때부터 나의 공개강좌를 듣고, 문화유산답사에 참으로 열심히 즐겁게 따라다녔다. 그때 나는 그의 미술학도로서의 성실성과 무언가 내면적 울림을 갖고 있는 노래를 듣고 보면서 그의 작가적 기질이 잘 자라나기를 속으로 기대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그림에 매진하기를 바란다며 “10년 뒤쯤 네가 개인전을 갖게 되면 평을 써주마”라고 말했다. 박현정은 그 말을 잊지 않고 나를 찾아왔고 나는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기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꼭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글을 쓸 위인이 아니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현정이의 안내로 인사동 표구점에 가서 그의 30여 작품들을 하나씩 펼쳐보면서 나는 내심 흐뭇함을 느꼈다. 지난 10여 년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며 작업해 왔는지에 대해 아무런 예비지식이 없는 가운데 일별해 보는 그의 작품엔 어느새, 결코 쉽지 않은 자기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박현정은 대상을 관찰하는 쪽이 아니라 대상을 통하여 자신의 관념을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해 나가는 것이 분명했다. <산> <비> <바다> <꽃> 같은 구체적인 형상을 담아내면서 그것을 모두 기호화시키고 문양화시키면서 또 다른 이미지에로 비약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밤> <어둠> <환생> 같은 비형상의 주제를 나무와 새 등을 통해 나타내면서 이 기호․문양의 상징성을 이용하고 있다. 어떤 작품을 보든 박현정은 대상과 관념을 형상과 기호로 묶어 상징의 공간으로 나아가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억지스러운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정물화로 때로는 기하학적 추상으로 때로는 서정적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까지 남들이 차지하지 못한 공간구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 점이 나로서는 대견하고 흐뭇했던 것이다. 이제 그는 화가로서 설 수 있는 입지를 그렇게 확보한 것이다. 

박현정의 작품 속에서 내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작품은 <할머니>라는 작품이었다. 돌장승처럼 표현한 작품이야 그 의미를 모를 것 없었지만 고목 아래 바구니를 들고 등을 보이고 있는 할머니와 나무 줄기에 얽혀있는 무늬는 어떤 함수 관계가 있는 것일까? 나중에 현정이에게 직접 들은 바로는 내가 기호, 무늬라고 말한 것은 사실 부적(符籍)에서 따온 이미지의 변형이었고, 할머니를 작품의 소재로 자주 썼던 것은 염불을 외시던 할머니의 그 무심의 경지가 자신의 조형사고를 그렇게 붙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 고백은 박현정의 모든 작품을 내가 새롭게 보게 하는 열쇠가 됐다. 

현대미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되도록 캔버스를 떠나려고 한다. 더욱이 형상, 기호, 관념, 서정 같은 조형언어를 방기해 버리고 동영상과 행위 그리고 전자, 광선 쪽을 더 선호하고 있다. 이런 조류 속에서도 전통적인 화폭을 지키며 그런 현대성이 누락시키는 현대성을, 그것도 일상의 평범 속에서 잡으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참으로 외롭고 답답한 일이다. 그러나 박현정은 따블로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진부하지 않고, 흔히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선적이지도 않은 의미 상징이 살아있는 공간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이렇게 밝고 즐겁고 긍정적이면서도 생의 은은한 의미를 내비치는 자기양식을 만듦으로써 그만의 현대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남이 해보지 않는 일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박현정의 그림이 때로는 기호가 강하여 문양의 단순성으로 흐를 가능성도 있고, 때로는 의미부여가 저만의 비밀스런 견강부회가 될 수도 있다. 또 형상과 기호가 괴리되면 작품의 주제가 상실될 수도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나는 현정이와 함께 그의 작품을 하나씩 다시 보면서 낱낱 작품에 대한 나의 소견을 말했다. 이 작품은 위가 약하다, 이 작품은 배색이 너무 튄다. 이 작품은 위를 차단해야 되지 않을까, 이 작품은 더 강화시켜야 될 것 같은데. . .하며. 현정이는 내가 하는 말을 조용히 귀담아 듣고 있었고, 나는 지금의 한 화가와 한 평론가의 만남이라는 사실을 잊고 그 옛날의 사제관계로 착각한 채 내 소감을 말하곤 했다. 그가 얼마만큼 내 조언을 받아들여 작품에 반영했는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10년이 넘어도 선생을 잊지 않고 찾아준 것이 고마웠고, 평을 써줄 수 있을 만한 자기형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반가웠으며, 다시 사제간으로 대화했다는 것이 즐거웠다. 

박현정의 첫 개인전에 출품될 작품 중 내가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비>와 <꽃> 그리고 <강>이었다. 이것은 분명 내 개인취향을 말한 것이지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그에게 있어서는 대상에서 출발한 작품이 관념에서 추출된 작품보다 훨씬 성공적이라는 말도 된다. 개인전 이후 그의 작품에서 박현정은 모름지기 대상에 대한 관조와 관찰에서, 유식하게 말해 대상에 대한 인식론적 접근이 아니라 존재론적 접근에로 나아가는 것에 확실한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게 추구된 다음 작품은 어떤 것일까? 그래서 화가의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고 기대하게도 하는 것이다. 


2009


박현정, 꽃을 바치다

                                                                                                                                                                                                                                                                                                    박 영 택  <경기대학교교수,미술평론가>


꽃은 의식이고 예배이자 축원이며 기원이자 소망과 주술로 가득하다. 옛사람들은 죽은 이를 위해 꽃/종이꽃을 바쳤고 산 자들의 생의 기념과 장수를 축원하는 자리, 집안의 경사에 들이는 밥상에도 꽃을 꽂고 그 밥상을 받는 모든 이들의 머리에도 꽃을 꽂았다. 일찍이 신라의 화랑이나 원화 모두 꽃관을 썼고 농악대도 꽃관을 두르고 과거에 급제해도 어사화를 꽂았다. 죽음을 의식했고 따라서 매장풍습을 했던 네안데르탈인의 무덤가에도 꽃을 뿌린 그 아득한 흔적이 남겨져있다고 한다. 그러니 꽃이 인간의 삶에서 기호적 역할을 한 것은 너무도 오래된 일이다. 우리 선조들은 꽃을 ‘밝다’ 라고 말한다. 꽃에서 우주의 조화로움과 평화로움, 완벽함을 떠올렸던 것이다. 알다시피 꽃은 원추로부터 시작되어 스스로 한 바퀴 원을 그음으로써 한 개의 아름다운, 완벽한 형상/ 꽃을 만들어낸다. 꽃의 향기는 그 꽃잎들이 한바퀴 원을 그리게 될 때 비로소 풍겨나오는 것이다. 수직이나 수평운동과 달리 이 원은 순환과 완벽함을 스스로 증거한다. 그러니 꽃의 이치를 헤아린다는 것은 결국 우주 만물의 이치와 조화를 깨닫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에게 꽃은 일종의 종교이자 상징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같은 꽃을 누군가에게 바친다는 것은 멋있고 아름다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꽃상여를 장식한 아름다운, 서글픈 꽃을 잊지 못하고 굿판이나 모란꽃 가득한 민화를 잊지 못한다. 베겟모에 촘촘히 자수된 꽃 역시 그렇다. 그 꽃들은 한결 같이 남루하고 슬픈 생애의 아픔을 이기고자 하는 바램을 기원하며 축원한다. 인간적인 생의 본능을 간절히 기원하는 욕망이 꽃으로 표현되었고 그 꽃에 모든 것을 걸었던 애절함이 그토록 화려하게 피었다.  

 「꽃을 바치다」 , 90 X 120cm, Ink on acrylic on Korean paper, 2009

오랜 만에 접하는 박현정의 그림에는 꽃이 가득하다. 가위로 오려낸 종이 꽃들이 화면에 붙여졌다. 가위나 조각칼을 사용하여 한지를 오려 붙여 완성한 전통적인 전지공예를 연상시킨다. 채색과 먹의 농담과 붓의 지나간 자취를 부분적으로,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종이의 편린, 조각조각들이 오려지고 잘려져서 화면에 올라왔다. 그 조각들이 사람의 형상과 나무와 새, 적조한 풍경을 안긴다. 산과 나무, 사람과 새, 꽃과 풀의 형상을 지닌 것들이 광막해 보이는 배경을 뒤로하고 호젓하고 고요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기와 수공예가 구분없이 섞여있고 앞, 뒤로 칠해지고 붓이 지나간 흔적과 손톱이나 또 다른 도구가 여러 효과를 자아내면서 겹성의 소리를 낸다. 발화한다. 그것은 종이로 이루어진 회화, 콜라주이자 종이조각이고 종이로 구성된 저부조다. 납작한 종이의 표면 위로 슬쩍 융기되어 부푼 부위(칼로 이루어진 윤곽선)는 평면 회화 안에서 입체적으로 돌올하다. 모필의 부드럽고 유연한 맛에 반해 이 칼 맛은 단호하고 힘이 있다. 판각에서 접하는 칼의 기운이나 목판의 기세가 느껴진다. 한결같이 기(氣)가 느껴진다고 할까. 촉각적이면서 붓으로는 낼 수 없는 선의 효과, 맛이 먹의 번짐과 함께 뒤섞여 흐른다. 우리 전통미술에 대한 익숙한 체험과 안목, 두툼한 체득과 이해가 이 같은 효과를 자유로이 구사하는 바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림에 대한 인상은 무척 쓸쓸하고 호젓하다는 것이다. 조금은 익숙한 풍경이지만 빈 나뭇가지, 산과 언덕, 날아다니는 새, 호젓하게 소요하는 듯한 한 사람의 모습이다. 광막하고 황량한 풍경 속에 누군가가 등을 보이고 걸어가거나 서있다. 부유한다. 그 위로 새들이 덧없이 날고 바람이 거칠고 홀연 해가 지는 듯 하다. 산수화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산수화를 보면 더없이 외롭다. 그림 보는 이에게, 세속에 사는 우리에게 등을 보이고 산을 향해 걸어가는 한 남자의 뒷모습은 현실계와 단호한 이별을 통해 자기 세계로 가고자 하는 이의 구원같은 길을, 그 여정을 보여준다. 산 속의 누군가를 찾아거거나 그 산에 핀 매화나 난을 향해 혹은 산 그 자체의 품으로 돌진하는 기운과 생의 의미가 서늘하게 감촉된다. 속세와의 인연을 과감히 끊어내고 사라지는 이의 뒷모습은 깨달음을 찾고자 하는 이들의, 공부하는 모든 이들의 모습이다. 생각해보면 죽은 이들 역시 그러한 모습을 잔상처럼 안기고 흩어진다. 죽은 이들은 결국 산에 묻힌다. 하늘에 보다 가까이 가 닿은 산 속에 은거하고 휴지하는 것이다. 산 자들은 산을 찾아 죽은 이를 추모하고 그에게 꽃을 바치고 그 같은 의식을 통해 순간 죽은 이와 연동된다. 죽은 이는 산 자의 기억 속에서 부유한다.

작가는 몇 해전 부친의 사망,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여행길을 추모하며 화선지를 한 장 한장 오리고 붙이면서 꽃을, 그림을 만들었다. 비로소 그림들이 한결같이 쓸쓸함, 모조의 슬픔 같은 것들을 안기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작가는 새의 형상을 재현해 인간 삶의 찰나적인 순간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나이테를 품고 있는 나무의 형상을 통해서는 인간 삶이 남긴 길고 질긴 자취를 표현하고자 했다. 종이를 오려 꽃을 헌사하고 추억을 기술하고 죽음으로 인한 여러 상념을 도상화하는 일이다. 아울러 그 행위는 아버지의 저승길에 꽃을 뿌려드리며 그 이별을 고하는 의식과도 같은 행위인 셈이다. 개인적인 슬픔과 상실을 위안하고 치유하는 행위이자 기억을 통해 죽은 이의 망실을 지연시키는 일이다. 또한 죽음을 관망하면서 보편적 인간 삶의 한 모습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종이를 오려내고 잘라내는 일은 덜어내고 지우면서 표현하는 일이다. 공들여 오리고 정성껏 자르는 행위는 시간을 견디고 상처를 봉합하는 일이다. 온 마음을 다 바치는 의식이다. 작가는 무의식적으로 꽃을 오려낸다. 종이의 편린들을 가지고 조각조각 이어서 어떤 장면을 안긴다. 연결해나간다. 그것은 다분히 치유적이다. 납작한 종이의 표면에 오려낸 조각들이 올라와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 주는 단어, 음성, 발화의 매개들이 되었다. 그로인해 다양한 마음과 몸짓이 외화된다. 이렇듯 작가에게 그림 그리기는 자신의 내면을 호명해 그것들에게 하나의 몸을 성형해주는 일이다. 손의 수고로운 노동과 지극한 시간의 견딤을 통해 비로소 가능한 어떤 경지가 어른거린다.